4월 모임 후기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가지고 만나는 마지막 모임이었네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저자는 삶의 의미를 가진 사람은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지난 1월 남편을 먼저 보내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는데, 그래서 이 책이 딱히 도움이 되진 않는다 생각했어요. 그저 남편을 따라 나도 죽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사별 후 드는 자연스러운 감정일테고, 죽을 용기는 없으니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었지요. 이번 모임을 앞두고 다른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묻는데, 우리가 삶으로부터 오는 질문에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구요. 대답을 해주기 위해 우선 살아봐야 할거 같습니다.

  남은 인생은 내게 주어져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남은 인생을 분노와 슬픔으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불행하냐고 한탄하면 살 것인지, 때때로 아프고 욱신거리는 슬픔이 찾아오겠지만 기쁘고 감사한 삶을 살아갈지 말입니다. 운명에게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진 않을 겁니다. 저에겐 제 삶을 어떤 태도로 살아갈지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요. 빅터 플랭클도 부인을 수용소에서 잃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지 않는 부인 대신 부고가 찾아들었지요. 그도 심한 우울에 시달렸다고 그러더군요. 의기양양하게 여기에 주도적인 삶을 살겠다곤 하지만 여전히 많이 울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넋을 놓곤 합니다. 천천히 다시 힘을 찾길 바랍니다.


180502 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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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저는 사실, 이 책에 대해서 큰 호감을 느끼지는 못했다고 멤버들에게 고백했습니다. 참혹한 일상들에 대한 지나치게 객관적인 전달은 물론 화자의 선택이고 방식의 전달방법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듣고 싶다'라는 부분이 있었는데 딱 그 앞에서 멈춰버리는 것이 감질나고 아쉽고 왠지 벽 앞에 서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객관성과 담담함이라는 옷을 입고 나에게는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아 약간의 갑갑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이 짧은 책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글귀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첫번째는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와 함께 한 야다는 최근 소중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삶의 의미가 사라질 만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저는 평소에도 삶의 의미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이고 얇은 끈처럼 끊어지기 쉬운 재질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 왔습니다. 거대한 문명을 이루고 복잡한 규칙을 만들고 그런 것들이 전부 다, 사실은 삶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가리기 위한 것은 아닐까 자주 생각하는 편입니다.
  야다님은 삶과 죽음이 아주 먼 것이 아니구나, 아주 가까운 것이구나 하고 말했습니다. 그말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발밑에 있는데 그걸 공포로 느끼면 쫓기는 기분으로 살게 되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보다 충실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물론, 고통으로 일그러진 순간에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때가 많죠. 우리 책멤버들도 그랬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 때문에 허우적댈 때면 차라리 죽음 이후에는 적어도 고통은 레벨 0 까지 떨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해결을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을 십분 이해합니다. 물론 지금 저는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느껴보자면서 그걸 쫓아다니고는 있습니다. 제게 기쁨을 주는 취미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걸 할 때 행복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을 할 수 없게 된다면? '죽음의 수용소'처럼 누군가에 의해서 제약을 받거나 신체적인 이유로, 실력이 부족해서, 돈이 부족해서, 열정이 소진돼서 등으로 할 수 없게 된다면?
  삶의 의미라는 게 사라지겠죠? 어차피 죽는 것은 생각보다 쉽고 죽음은 우리의 곁에 항상 걷고 있으며 나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에게 실제적으로 삶의 의미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요. 그저 자신이 하는 행동에 기반 해서 의미를 부여합니다.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의 미래에, 연구를 하면 그 연구의 효용성에,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면 그들이 이끌어올 더 나은 세상에. 하지만 결과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게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상적이었던 두 번째 부분이었습니다. 탈출을 하는 것인 줄 알았지만 끌려가서 죽임을 당한 무리가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가 생을 살아갈 때 생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그 의미 부여가 진정 객관적이고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하면 대답은 전혀 아니라는. 의미 부여는 주관적이며 어쩌면 멀리서 보면, 미래에서 보면 아주 어리석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프랭클은 머릿속에서 요구하는 질문에 매달리는 걸 멈추고 하루하루의 현실에서 작은 행복을 발견하라고 했어요.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시에 이 결론 무척 독일인 같다고 생각을-_-;) 내 앞에 놓여진 철길이 있는데 그게 어디까지 이어져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의미를 확정하고 기뻐한 며칠 뒤에 그 철길은 끊겨 있는지도 모릅니다. 철길이 플라스틱 재질이라 도금재질로 바꾸는 데 내 삶의 의미를 찾겠다고 결심했는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얼마 뒤 스테인레스 재질로 바뀔지도 모릅니다. 삶과 이 세계는 부당함과 예측불가능성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해변에서 모래성 쌓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열심히 모래성을 만들지만 언제 파도에 쓸려가 버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모래성은 내가 만들지 누가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삶은 내가 질문을 던지고 내가 답을 찾는 과정일까요. 아무도 봐주지 않는 원맨쇼일까요. 그래서 항상 답은 내 안에 있다고 하는 걸까요? 기본적으로 허무하지만 아무도 허무하다고 말하지 않고 나 역시도 허무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그리고 허무하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실에 집중하면 손 놓고 그저 파도만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그래서 허무해짐과 우울해짐과 극단적인 상황판단과 끝내는 난 그냥 파도 속으로 들어갈래가 여러 번 교차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180505 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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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이 삶을 선택한 것은 저 역시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행동이에요. 지금 불행하고, 앞으로도 불행할 가능성이 높은데 왜 그리 살고자 투쟁을하나. 
  그냥 저는 그 책을 믿음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인용하자면, 믿음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죠. 그사람은 아내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었죠. 그리고 나날이 지옥이 더해갈 거라고는 믿지 않았죠. 그 믿음에 무슨 근거가 있겠냐마는 그는 그가 믿는 그것을 바랬던 거겠죠. 난로 언니가 말한 것처럼 그 믿음은 모래성이에요. 세상은 그에게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모래성은 그가 처한 지옥불보다 강해서 그를 살려내고 그 이후의 그의 인생을 피워내고. 그 나비날개마냥 허황한 것이 산을 옮기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믿음이란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가하는 생각을 종종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이 책을 신앙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탈출 후 숲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가 수용소에 있을 때 주가 이곳에서 그를 부르셨음을 불현듯 이해하게됩니다. 이 책의 최고의 클라이막스입니다. 만약 그 신으로부터의 계시가 사실이라면 운명적인 신의 인도는 실제로 있었고, 그는 신을 믿음으로써 그인도를 받을 수 있었고 결국 그 숲에 도달한 거겠죠. 
  ...하지만 수용소에서 그 숲을 어떻게 떠올릴 수 있죠? 어떻게 나를 이곳에 보낸 신이 반대로 나의 안식을 예비했을 거라고 믿을 수 있죠? 
믿을 '수'는 없었을 거에요. 그저 믿기로 한 거겠죠. 왜?..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믿음이 자기의 영혼에 유익했음을 알았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저도 그 책을 읽으면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을 적에, 나의 이 비참하고 찌르는 듯이 아픈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온 세상을 헤메이고 있었거든요. 
  내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그 의미를 살아낼 거라고 믿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괴로웠으니까, 그리고 살고 싶었고 행복하고 싶었고 내 영혼을 충만하게 하고 싶었으니까. 
  신의 편린같은 내 영혼은 어떻게 해야 내 영혼이 완성될지를 알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너무나도 괴로웠기때문에, 마치 팔자가 센 사람들이 종교인이되고 서양민담에서 장애가 있거나 마을에서 배척당한 사람들이 영적 능력을 소유하게 되듯이, 저는 지독한 고통으로 오히려 정화되어 제 영혼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었던 거겠죠. 이렇게 고통으로하여금 더 깊은 내면과 접촉하게 되는 인간의 본능은,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생명력을 만들어내는 인간 본성의 강인함같은게 아닐까... 해요.
  흠 뭐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상처를 도울 수 있을 거라는 꿈에 매달렸고 상담쪽으로 진학을한거죠. 지금은 살기위해 매달려야만했던 취약한 시기를 지나 그 꿈을 다시 거리두고 바라보고있는 중입니다만 쨌든 그런 의미부여는 저에게 정말 소중했던것 같네요. 그런 '믿음'이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하고 물으면 저는 그저 믿음 사랑 소망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제 언어로 말하자면 믿음 사람 그리고 바람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같아요.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존재, 그리고 내가 선택한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 이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원함과 갈망, 이런게 저를 살려준 순간들이 있었네요. 

180505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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